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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1. 11世 〉11. <부정공>선무랑훈동원봉사공휘종원묘갈명(宣務郎訓錬院奉事公諱宗元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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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정공>진사련담공휘이묘갈명(進士蓮潭公諱怡墓碣銘)
進士蓮潭公諱怡墓碣銘 谷城之梧岡鄉有潭數頃種蓮甚盛鑱諸石曰進士趙公蓮潭今距公之世三百餘年居人尚指點道如昨日事大夫士之過之者輒躊躇而咨嗟何處無潭何潭無蓮而能使人躊躇焉咨嗟焉則其賢可知己公諱怡字汝愼以 中宗甲辰生生四十八年辛卯十二月五日終彌勒洞卯坐而安厝後孫泳善東夏懼夫懿德之愈久愈泯謁余辭愈辭而愈請謹按公玉川人玉川今之淳昌也自高麗大將軍璋始顯冠冕奕葉至侍中忠獻公元吉策功封玉川君生副正瑜麗亡入杜門洞守義自靖再傳察訪智崙兄弟四人以篤友聞公之高祖也曾祖穩官尚瑞直長祖淑瓘監泰仁縣考勵節校尉 贈佐郎大成平日薰炙乃一齋牛溪栗谷諸先生所與友有鄭晴沙沼安竹菴瑑德業爲士友所推妣淑人長興馬氏都承旨世駿之女公有孝友有學問贄謁沙溪金先生經義之奥禮説之賾刃迎縷解犁然有當先生亟稱之年三十登進士試時 宣廟癸酉也居洋宮有年以道藝服曹偶一日自都下還對家人喟然曰禍亂無日朝野恬嬉將何以禦侮遂傾貲結交多致豪健盖其志氣若將有爲而局於短造鬱而不伸知公者莫不惜之嗟乎壽而富貴者今古何限崇其臺深其沼廣其園囿奇花恠石嘉木異卉栽培充滿於其中爲子孫無窮之計者曾不旋踵臺傾而沼堙園囿沒於榛莾大而如艮嶽小而如平泉者指不勝摟而顧此窮邨之一渠菡萏百閲風霜清芬不沫布衣而未免夭者誰敢輕視之哉孺人李氏籍慶州父僉使仁壽墓用祔禮晦曄喡㫾安邦説鄭之推其四男二女也晦察訪喡參奉孫曾振振文學孝烈間見層出是公不食之報也歟銘曰淤泥不染獨立亭亭緬仰千載惟周先生能愛先生之所愛兮孰不慕公之貞 安東 金甯漢 撰 東江 진사연담공휘이묘갈명(進士蓮潭公諱怡墓碣銘) 곡성(谷城) 오강(梧岡) 고을에 두어 이랑(數頃)이 되는 연못이 있는데 연꽃을 심어 매우 아름다운데 「진사 조공의 연담(進士趙公蓮潭)」이라 새긴 비석이 서 있어 공이 가신지 三백여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그 고장 사는 사람들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손짓을 하며 이야기한다. 또 그곳을 지나는 사대부들도 걸음을 멈추고 감탄한다. 어느 곳엔들 연담이 없겠는가만 이처럼 사람들이 머뭇거리며 감탄하는 것을 보면 공이 어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다. 공의 휘는 이(怡), 자는 여신(汝愼)인데 중종(中宗) 갑진년(一五四四)에 태어나 四十八년 살다가 신묘년(一四七一) 十二월五일에 졸하여 미륵동 묘좌(卯坐)에 안장하였 다. 후손 영선(泳善)과 동하(東夏)가 공의 아름다운 덕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없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나를 찾아왔는데 나는 사양했으나 더욱 간절히 청하므로 이에 서술한다. 삼가 살피건대, 공은 옥천인이니 옥천은 오늘날의 순창이다. 고려 대장군 장이 현달 하면서부터 벼슬이 이어졌고 고려말에 시중 충헌공 원길(元吉)은 공훈으로 옥천부원군 에 봉해졌다. 이 분이 부정(副正) 유(瑜)를 낳았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의를 지키며 살았다. 다시 내려와 찰방 지륜(智崙)은 네 형제가 우애가 돈독한 것으로 유명하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온(穩)은 상서원직장(尚瑞院直長)이며 조 숙관(淑瓘)은 태인현감(泰仁縣監)을 지냈다. 고(考)는 여절교위로 좌랑에 추증된 대성(大成)인데 평소 학문에 정진하여 일재(一齋) 이항(李恒)·우계(牛溪) 성혼(成渾)·율곡(栗谷) 이이(李珥) 등 여러 선생과 사귀었고 청사(晴沙) 정소(鄭沼)·죽암(竹菴) 안연(安瑑)과 덕으로 사귀어 서로 추중(推重)하였다. 비(妣) 숙인(淑人) 장흥마씨(長興馬氏)는 도승지 세준(世駿)의 따님이다. 공은 효도 와 우애가 돈독했고 학문이 깊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에게 경전의 뜻과 예 설(禮説)에 대해 공부하여 해석한 것이 모두 들어맞으니 사계 선생이 매우 칭찬하였다. 三十세에 진사시에 합격하니 이때는 선조(宣祖) 계유년(一五一三)이었다. 성균관(成 均館)에 一년 남짓 있었는데 동료들이 공의 학문과 예능에 복종하였다. 하루는 도성에 서 집으로 돌아와 집 사람들에게 탄식하기를, 『난리가 곧 일어날 터인데도 조정에서는 편안한 것만 즐기니 장차 어떻게 적을 막을 것인가?』 하고는 마침내 재산을 털어내어 벗을 사귀되 호걸스럽고 건장한 사람을 많이 불러 모았으니 장차 그 지기(志氣)를 펼 수 있었을 것인데 명이 짧아 펴지 못하며 공 을 아는 사람들 모두가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 명이 길고도 부귀한 사람은 고금에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만 높다란 정자, 깊은 연못, 넓은 정원의 기화요초와 괴석(恠石) 아름다운 초목을 그 가운데서 기르면서 자손을 위해 무궁한 계책을 세운 자로 일찍이 한번 가면 오지 못해 정자는 기울고 연못은 묻히며 정원은 황폐해졌다. 크게는 간악(艮嶽:중국에 있는 산 이름)이 그렇고 작게는 평천자(平泉莊:당나라 이덕유(李德裕)의 별장)이 그래서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런데 오직이 외떨어진 마을의 한 연못에 연꽃의 맑은 향기가 백세토록 풍겨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포의(布衣)로 요사(夭死)를 면치 못한 자라 해서 그 누가 감히 공을 가볍게 여기겠는가? 유인(孺人) 이씨의 본관은 경주로 아버지는 첨사(僉使) 인수(仁壽)이며 묘는 부장이 다. 아들은 회(晦)·엽(曄)·위(喡)·상(㫾)이며 사위는 안방열(安邦説)·정지추(鄭之推)로 四남二녀를 두었다. 회는 찰방이요 위는 참봉이다. 손자와 증손자가 떨쳐 일어나 문학(文學)과 효열(孝 烈)이 겹겹이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공의 남긴 음덕이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 다. 진흙에 물들지 않고 淤泥不染 홀로 우뚝한 이는 獨立亭亭 천년을 우러러도 緬仰千載 오직 주 염계 선생뿐인데 惟周先生 주 선생 사랑하던 연꽃을 사랑함이여 能愛先生之所愛兮 그 누가 공의 곧음 존경하지 않으리. 孰不慕公之貞 안동(安東) 김영한(金寗漢) 지음 註:※간악(艮嶽):中國 河南省에 있는 山名. 宋나라 徽宗初에 아들이 귀하니 地師가 서울 東北쪽이 地理가 좋으니 크게 山을 만들라 함으로 토역을 이르케 큰 산을 무어 萬壽良嶽이라 이름 하였음. ※平泉:河南洛陽현 南주회四七支郡里 唐나라 李德裕別庄인데 平泉莊정원 花木風景이 仙境같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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